유대인의 부엌
코셔법이 퍼뜨린 식재료들
베이글이 뉴욕의 음식이 된 건 유대인이 쫓겨났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뉴욕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바르고 있을 것이다. 그 장면은 너무나 미국적이어서, 그것이 원래 동유럽 유대인의 빈민가 음식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베이글이 뉴욕에 닿기까지, 거기에는 2,000년의 추방과 이동,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음식을 붙들었던 한 민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쫓겨난 민족이 짐 속에 챙긴 것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으로 시작됐다. 기원후 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다시 무너뜨리면서 유대인들은 지중해 전역으로 흩어졌다. 이후의 역사는 추방의 연속이었다. 1290년 영국 추방, 1492년 스페인 추방. 이들이 정착했던 곳마다 언젠가는 떠나야 했다.
집을 잃고 나라를 잃을 때, 언어와 종교와 함께 가장 쉽게 들고 다닐 수 있는 문화가 있었다. 바로 음식이었다. 밀가루와 소금과 이스트로 만드는 빵의 레시피, 어떤 고기를 어떻게 도살해야 하는지에 대한 법, 무엇과 무엇을 함께 먹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 유대인들이 어디를 가든 이 규칙들을 지켰고, 그 규칙들이 결국 하나의 음식 세계를 만들었다.


코셔(Kosher) — 음식으로 쌓은 울타리
카슈루트(Kashrut), 즉 코셔 율법은 토라에서 비롯된 유대교의 식이 규정이다. 핵심 규칙들은 얼핏 단순해 보인다. 발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동물(소, 양, 염소)만 먹을 수 있다. 돼지는 발굽이 갈라지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않으니 금지다.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해산물(조개, 새우, 문어)도 먹을 수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규칙 하나: 고기와 유제품을 절대 함께 먹지 않는다.
코셔 분류 체계
육류 (Fleishig)
소·양·염소·닭 등 코셔 도축된 고기류
유제품 (Milchig)
우유·버터·치즈·요거트 — 육류와 절대 함께 불가
파레브 (Pareve)
생선·달걀·채소·과일 — 둘 다와 함께 먹을 수 있음
이 규정은 단순히 종교적 의례가 아니라 실질적인 식재료 선택의 기준이 됐다. 고기를 먹는 식사에는 버터가 든 빵도, 치즈도, 크림소스도 올라올 수 없다. 반대로 유제품 식사에는 고기가 없다. 두 종류의 식기를 별도로 관리해야 하고, 심지어 고기를 먹은 후에는 몇 시간이 지나야 유제품을 먹을 수 있다.
이 제한이 역설적으로 특정 식재료의 수요를 만들었다. 육류 식사의 빵에는 유제품이 들어가면 안 된다. 그러니 버터 대신 식물성 지방이 쓰이고, 빵은 담백해질 수밖에 없다. 베이글이 그 결과물이다. 밀가루, 소금, 이스트, 물. 유제품이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는다. 고기와 함께 먹어도 코셔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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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바꾼 식탁 EP.3] 코셔가 바꾼 유럽 음식
종교가 바꾼 식탁 — 신이 허락한 것과 금한 것Episode 3 / 8코셔가 바꾼 유럽 음식훈제 청어·마차 — 유대교 정결법이 유럽 식품 보존 기술을 이끌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훈제·절임·발효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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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글의 이동 경로: 크라쿠프에서 로어 이스트 사이드까지
베이글의 역사에 대한 가장 믿을 만한 기록은 1610년 폴란드 크라쿠프의 유대인 공동체 조례에 등장한다. 이미 그때 베이글은 유대인 공동체의 일상 식품이었다. 폴란드는 당시 유럽에서 유대인에게 가장 관대한 나라 중 하나였고, 자연스럽게 아슈케나짐(Ashkenazim, 중·동유럽 유대인) 공동체가 크게 형성됐다.

베이글의 이동 경로
17세기 · 폴란드 크라쿠프
끓는 물에 데쳐 굽는 링형 빵, 유대인 공동체 조례에 공식 등재. 고기와 함께 먹기 위해 유제품 미포함이 원칙.
1880~1924년 · 포그롬과 대이주
러시아·동유럽 전역에서 반유대주의 학살(포그롬) 폭발. 40년간 약 200만 명의 이디시어권 아슈케나짐 유대인이 미국으로 이주.
1900~1930년대 · 뉴욕 로어 이스트 사이드
맨해튼 남동쪽 슬럼에 유대인 이민자 밀집. 거리 수레에서 시작된 베이글 장사가 델리카트슨(deli)으로 발전. 1930년대 중반 뉴욕에만 5,000개 이상의 델리 형성.
1945년 이후 · 미국 전역으로
홀로코스트 이후 유럽에서 미국으로의 유대인 이주 가속. 유대인 2~3세대의 교외 이동과 함께 베이글도 미국 주류 문화로 진입. 크림치즈를 곁들이는 방식도 이 시기 정착.
베이글이 뉴욕의 상징이 된 것은 단순히 맛이 좋아서가 아니다. 이 빵은 쫓겨난 사람들이 새로운 땅에서 자신의 음식 정체성을 붙들기 위해 만들었고, 그 절박함이 담긴 쫄깃함이 비유대인의 입맛까지 사로잡았다.

델리카트슨 — 이민자의 식품점이 뉴욕을 먹이다
델리카트슨(Delicatessen), 줄여서 델리(Deli)는 원래 독일어에서 온 단어로 '조제 식품점'을 뜻한다. 뉴욕에서 이 단어는 유대인 이민자들이 만든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식료품점과 간이식당이 결합된 곳, 베이글과 피클과 파스트라미 샌드위치와 훈제연어가 쇼케이스에 가득 찬 곳.
훈제연어가 델리의 주요 메뉴가 된 데도 코셔 규정이 작용했다.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생선은 코셔다. 그리고 생선은 '파레브', 즉 중립 식품으로 분류돼 육류와도 유제품과도 함께 먹을 수 있다.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바르고 훈제연어를 얹는 조합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 이유에서다. 종교적 규정이 메뉴를 설계했고, 그 메뉴가 뉴욕의 브런치 문화가 됐다.

카츠 델리카트슨 (Katz's Delicatessen)
1888년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 문을 열어 지금까지 영업 중인 뉴욕의 전설적인 유대인 델리. 처음에는 동유럽 유대인 이민자들의 식사 공간이었던 이 식당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파스트라미 샌드위치 가게가 됐다.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메뉴는 13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파스트라미도 코셔 식문화에서 자란 음식이다. 원래는 오스만 튀르크의 육류 보존법 '파스트르마(pastırma)'가 루마니아 유대인들에게 전해지면서 시작됐다. 루마니아에서는 저렴한 거위 가슴살로 만들었는데, 19세기 말 이민자들이 뉴욕에 정착하면서 거위 대신 더 구하기 쉬운 소고기 브리스킷을 쓰기 시작했다. 향신료를 입혀 훈제하는 방식은 유지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파스트라미 샌드위치가 완성됐다. 피클 역시 마찬가지다. 오래된 채소를 소금물에 절여 보존하는 방식은 동유럽 유대인 가정의 기본 기술이었고, 그것이 델리의 사이드 메뉴가 됐다.

코셔법이 실질적으로 퍼뜨린 식재료들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음식 세계에 남긴 흔적은 뉴욕 델리에만 머물지 않는다. 코셔 규정은 특정 식재료의 수요와 공급 체계 자체를 만들어냈다.
마초 (Matzah, 무교병)
유월절(Passover)에 누룩 없는 빵만 먹어야 하는 규정이 전 세계 유대인 공동체에 밀가루 납작빵 문화를 만들었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에는 '마초'가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코셔 식품이 됐다.
파레브 마가린
유제품을 대체할 식물성 지방의 수요가 코셔 가정에서 폭발했다. 고기 식사에 쓸 수 있는 버터 대용품으로 식물성 마가린이 일찍부터 발전한 배경에 코셔 식품 시장이 있다.
코셔 소금
코셔 도축법은 고기의 피를 빼는 과정에 굵은 소금을 쓰도록 규정한다. 이 '코셔 소금'은 현재 미국 요리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요리용 소금이 됐다. 입자가 굵어 요리사들이 선호하기 때문이다.
훈제·염장 생선
파레브(중립) 식품인 생선은 어떤 식사에도 올릴 수 있었다. 오래 보관하기 위한 훈제·염장 기술이 발달하면서 훈제 청어, 훈제 연어, 절인 생선이 유대인 이민자들을 통해 미국 식문화에 뿌리내렸다.

이스라엘의 음식은 왜 '유대인 음식'이 아닌가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유대인의 국가가 생겼다. 하지만 이 나라의 음식 정체성은 단일하지 않다. 2,000년간 전 세계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각자 다른 음식 전통을 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유럽 출신 아슈케나짐의 베이글과 파스트라미, 중동·북아프리카 출신 미즈라힘의 쿠스쿠스와 타히니, 에티오피아 출신 베타 이스라엘의 인제라. 이스라엘 음식은 디아스포라의 총집합이다.
베이글은 이스라엘에도 있지만 현지 음식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대표 빵은 피타와 할라다. 반면 미국의 베이글은 뉴욕 유대인의 음식이 됐다. 같은 민족, 다른 이주 경로, 다른 음식. 디아스포라가 어디에 뿌리를 내렸느냐가 그들의 음식 정체성을 결정했다.


"베이글은 유대인 음식이지만 이스라엘 음식은 아니다. 동유럽 아슈케나짐의 음식이지만 폴란드 음식도 아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빵이지만, 그것이 미국적인 이유는 바로 미국이 이주민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쫓겨난 자들이 남긴 맛
베이글 하나의 역사에는 추방과 이동, 종교적 규범과 생존의 지혜, 새로운 땅에서의 정착이 모두 들어 있다. 코셔 율법은 유대인들이 어디에 있든 동질성을 유지하게 해주는 규정이었지만, 그 규정은 동시에 그들이 가는 곳마다 새로운 음식 문화를 만들어냈다.
오늘 뉴욕 어느 카페에서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바르는 사람은 아마 그 빵의 역사를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 빵 안에는, 2,000년 동안 짐을 싸고 또 싸며 이동했던 사람들이 놓지 않은 레시피 하나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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