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와 식재료 (Food & History)

[항구의 식탁 EP.4] 알렉산드리아 — 이집트·그리스·아랍이 뒤섞인 렌틸·무화과·커민의 역사

by 소금꽃한스푼 2026. 5. 19.
 
항구의 식탁 — 바다가 만든 음식들
Episode 4 / 8
알렉산드리아
지중해의 교차로 — 렌틸·무화과·커민이 쌓아올린 수천 년의 밥상
 

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집트의 나일 삼각주 서쪽 끝, 지중해에 면한 어촌 라코티스(Rhakotis)를 가리켰다. 그는 이 자리에 도시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설계는 마케도니아의 건축가 디노크라테스(Dinocrates)에게 맡겼다. 바둑판처럼 교차하는 큰길, 두 개의 항구, 광장과 신전과 도서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는 세계를 상상한 한 인간의 머릿속에서 설계도로 태어났다.

알렉산드로스는 정작 완성된 도시를 보지 못했다. 그는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33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하지만 그가 남긴 도시는 그 어떤 정복지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의 장군 프톨레마이오스(Ptolemy)가 이집트를 차지하고 스스로를 파라오로 선언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가 된 알렉산드리아는 불과 한 세기 만에 지중해 최대의 도시 중 하나로 성장했다. 전성기에는 인구 50만에서 100만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고대 로마 제국 시절, 로마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이 도시의 항구에는 세계가 모였다. 이집트의 밀, 인도의 향신료, 아라비아의 유향, 그리스의 올리브유, 로마의 은화. 상인들이 드나들었고, 그들의 음식도 따라 들어왔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그리스인, 로마의 지배자, 아랍 정복자, 오스만 제국의 관료 — 알렉산드리아의 밥상은 누가 이 도시를 지배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지만, 핵심은 변하지 않았다. 렌틸(lentil)은 파라오 시대부터 지금까지 이 도시의 식탁에 오른다. 커민(cumin)은 기원전 1550년의 의학 파피루스에 이미 등장한다. 무화과(fig)는 고대 이집트 왕의 제단에 올랐고, 지금도 알렉산드리아의 시장 바구니에 담긴다. 음식만큼 도시의 진짜 역사를 오래 기억하는 것은 없다.

알렉산드리아의 건설 계획 - 출처 : https://sarahholz.com/2020/09/21/forces-of-nature-and-history-the-city-in-the-ancient-world/
프톨레마이우스 -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Ptolemy_I_Soter

📜 역사와 문화
파라오에서 오스만까지 — 알렉산드리아는 어떻게 지중해의 식탁이 됐는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 도시 — 지식과 곡물의 항구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5~30년)가 다스린 알렉산드리아는 단순한 무역항이 아니었다. 왕조는 왕실 독점 체제로 이집트의 모든 수출입을 관리했다. 인도와 아라비아에서 오는 향신료, 아프리카 내륙의 상아, 이집트의 파피루스와 리넨이 이 항구를 거쳐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중 가장 중요한 품목은 밀이었다. 나일강 하류 삼각주의 비옥한 땅에서 생산된 이집트 밀은 그리스, 로마, 지중해 전역의 식량을 책임졌다. 알렉산드리아는 '세계의 식량 창고'였다.

동시에 이 도시는 지식의 집결지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세운 무세이온(Mouseion, 학문 연구소)과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완성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Bibliotheca Alexandrina)은 고대 세계 최대의 지식 저장소였다. 입항하는 모든 선박이 소지한 두루마리는 의무적으로 필사해 도서관에 납본해야 했다. 유클리드가 기하학을 정리했고,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의 둘레를 계산했으며, 아르키메데스도 이 도시에서 연구했다. 상인의 도시이자 학자의 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는 당연히 음식에서도 세계를 흡수했다. 그리스인들은 올리브유를 들여왔고, 이집트 원주민의 렌틸 요리는 그리스식 조리법과 섞였다.

무세이온 - 출처 : https://assassinscreed.fandom.com/wiki/Mouseion_of_Alexandria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 출처 : https://www.happyegypt.com/blog/best-things-to-do-in-alexandria/alexandria-library-egypt
로마·아랍·오스만 — 알렉산드리아를 거쳐간 지배자들의 식탁

기원전 30년, 클레오파트라의 자살과 함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끝났다. 아우구스투스가 이끄는 로마가 이집트를 속주로 편입시켰다. 로마 시대의 알렉산드리아는 전성기에 접어들었다. 로마 제국이 인도와 직접 향신료 교역을 열었고, 알렉산드리아는 그 허브였다. 후추, 계피, 강황, 생강이 인도에서 홍해를 거쳐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내렸다. 이 향신료들이 지중해 요리 전체에 깊숙이 파고든 시기가 바로 로마의 알렉산드리아 지배기였다.

641년, 아랍 장군 아므르 이븐 알 아스(ʿAmr ibn al-ʿĀṣ)가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했다. 이슬람 세계의 일원이 된 알렉산드리아는 새로운 음식 언어를 흡수했다. 아랍식 향신료 조합 — 커민과 고수(coriander), 정향과 시나몬 — 이 이집트 전통 요리에 스며들었다. 콩류 요리인 풀 메다메스(Ful Medames, 누에콩 스튜)는 파라오 시대부터 존재했지만 아랍 향신료를 입고 오늘날의 형태를 갖췄다. 1517년부터는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를 지배했다. 오스만의 통치는 쌀 요리와 달콤한 페이스트리, 커피 문화를 알렉산드리아에 이식했다. 19세기에는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유대인 상인 공동체가 대거 정착했다. 이들이 가져온 파스타와 치즈가 이집트 음식과 뒤섞여 오늘날 쿠샤리(Kushari)로 알려진 이집트의 국민 음식이 탄생했다.

고수 - 출처 : https://www.veggycation.com.au/vegetables/coriander-leaves/
누에콩 - 출처 : https://www.homemadeitaliancooking.com/fava-bean-soup-with-lentils/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나일 삼각주 서쪽 어촌 라코티스에 알렉산드리아 건설 명령. 그리스식 바둑판 도시 설계. 동서양 무역 허브로 설계된 최초의 계획 도시.

 
기원전 305~30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1세 파라오 즉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무세이온 건립. 파로스 등대 완공. 이집트 밀의 지중해 수출 독점. 그리스·이집트·유대·페르시아 문화 공존. 헬레니즘 식문화 이집트 전통과 혼합 시작.

 
기원전 30년 ~ 기원후 641년 (로마·비잔틴 지배)

클레오파트라 사망, 로마 속주 편입. 전성기 인구 50만~100만. 인도 직항 향신료 교역 개시 — 후추·계피·강황 알렉산드리아 경유 지중해 전파. 로마 식문화 + 이집트 전통 요리 융합. 기독교 전파(성 마르코 선교).

 
641년 ~ 1517년 (아랍·맘루크 지배)

이슬람 세계 편입. 아랍어 공용화. 커민·고수·카다몸 등 아랍 향신료 체계 이집트 요리에 정착. 풀 메다메스·렌틸 수프 현재 형태로 발전. 14세기 흑사병 타격으로 도시 규모 대폭 축소.

 
1517년 ~ 19세기 (오스만·근대)

오스만 이집트 속주 편입. 1798년 나폴레옹 침공 후 근대화. 19세기 그리스인·이탈리아인·유대인 상인 대거 정착. 파스타가 이집트 요리에 유입 — 쿠샤리의 탄생 배경. 알렉산드리아 코스모폴리탄 식문화 최절정.

커민 — 파라오의 향신료, 5천 년을 살아남다

커민(Cuminum cyminum)의 이집트 역사는 문자 기록보다 먼저 시작됐다. 기원전 1550년경 작성된 이집트 의학 문서 에베르스 파피루스(Ebers Papyrus)에 커민이 소화장애 치료제로 명시되어 있다. 파라오 람세스 3세는 태양신 라(Ra)에게 커민을 제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커민 씨앗이 발견됐다. 기원전 5,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이 향신료는 이집트에서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신성한 물질이었다.

알렉산드리아가 지중해 무역의 중심이 되면서 커민은 그리스와 로마로 퍼져나갔다.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는 커민을 '모든 양념 중 가장 훌륭한 것'이라 썼다. 고대 그리스에서 커민은 소금·후추와 함께 식탁 위에 상시 올려놓는 기본 조미료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요리사 아피키우스(Apicius)가 기록한 로마 요리책 «데 레 코퀴나리아(De Re Coquinaria)»에는 생선과 콩류에 커민을 곁들이는 이집트 조리법이 다수 등장한다. 향신료가 항구를 통해 세계로 퍼지는 동안, 알렉산드리아는 그 진원지였다.

커민 또는 큐민 - 출처 : https://www.gardenia.net/plant/cuminum-cyminum-cumin-jeera
렌틸 — 파라오의 무덤부터 거리 노점까지

렌틸(lentil)은 인류 최초의 재배 작물 중 하나다. 기원전 약 8,000년경 근동 지역에서 재배가 시작됐다는 증거가 있다. 이집트에서는 파라오 시대 내내 서민의 주식이었고 제사 음식이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 왕가의 여사제 카라(Kara)의 제물 목록에 렌틸, 밀, 식초, 마늘, 양파가 겹겹이 쌓인 형태가 기록되어 있다. 사카라(Saqqara) 발굴에서는 병아리콩, 밀, 렌틸, 양파, 마늘로 만든 조리 흔적이 확인됐다. 수천 년 전 이집트인이 먹던 것과 오늘날 알렉산드리아 거리 노점에서 파는 것의 핵심 재료가 거의 같다.

알렉산드리아만의 렌틸 요리가 있다. 카이로식 쿠샤리가 갈색 렌틸을 쓰는 반면, 알렉산드리아식 쿠샤리(Alexandrian Kushari)는 노란 렌틸을 써서 훨씬 부드럽고 크리미한 질감을 낸다. 여기에 삶은 달걀을 얹는 것도 알렉산드리아 특유의 방식이다. 이 작은 차이 하나가 도시의 역사를 담고 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 헬레니즘의 영향을 카이로보다 오랫동안, 더 짙게 받았다. 달걀 요리에 대한 그리스식 선호가 이 도시의 렌틸 요리 위에 얹혀 남은 것이다.

렌틸 - 출처 : https://www.themediterraneandish.com/how-to-cook-lentils/
무화과 — 신의 열매, 지중해를 건너다

무화과(Ficus carica)는 지중해 문명과 함께한 과일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무화과는 왕의 제단에 오르는 신성한 열매였다. 이집트 벽화에는 무화과를 수확하는 장면이 수없이 등장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디오니소스는 무화과를 인간에게 선물한 신 중 하나로 묘사된다. 로마인들은 무화과를 말려 행군 식량으로 챙겼다. 알렉산드리아는 이 모든 문명의 교차점이었다. 여름이 되면 알렉산드리아의 시장에는 이집트산 신선 무화과가 산처럼 쌓인다. 알렉산드리아 근방의 지중해 기후는 무화과 재배에 최적이다.

무화과가 알렉산드리아의 식탁에서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갖는 교역사적 상징성 때문이기도 하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알렉산드리아 항구는 모든 출항 선박의 화물에서 파피루스 필사본을 징수했듯, 모든 식품의 집산지였다. 건조 무화과는 이집트에서 소아시아와 그리스로 향하는 수출품 중 하나였다. 알렉산드리아는 무화과가 나가는 항구이기 이전에, 무화과를 먹는 도시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무화과 - 출처 : https://horomidis.gr/en/product/ficus-carica-fig/?srsltid=AfmBOorHhpQTFx1OiYoCvu-sNseZrfxFNd602AJRbL3x0koiGK5izA5s
"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에는 세계가 모였다. 그리고 세계의 음식도 함께 내렸다. 지배자는 바뀌었지만, 렌틸과 커민은 남았다.
쿠샤리 — 모든 지배자가 남긴 한 그릇

쿠샤리(Kushari)는 이집트의 국민 음식이다. 쌀, 렌틸, 마카로니, 파스타, 병아리콩, 튀긴 양파 위에 매콤한 토마토 소스와 마늘 식초 소스를 얹는다. 탄수화물에 탄수화물을 겹친 이 기묘한 조합은 실제로 먹어보면 조화롭다. 각 재료의 기원을 추적하면 알렉산드리아의 역사 전체가 펼쳐진다. 렌틸과 쌀은 고대 이집트와 아랍 전통에서 왔다. 마카로니와 파스타는 19세기 이탈리아·그리스 이민자들이 들여왔다. 커민과 고수로 맛을 낸 토마토 소스는 오스만 시대 이후 정착한 조리법이다. 병아리콩은 고대부터 이집트 전역에서 재배됐다. 한 그릇이 수천 년의 이민사를 담고 있다.

쿠샤리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인도의 쌀·렌틸 요리 키치리(Khichdi)가 영국 식민지 시대 인도 노동자들을 통해 이집트에 전해졌다는 설, 오스만 제국 지배기에 쌀 요리 문화가 들어왔다는 설,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파스타를 더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설이 공존한다. 어느 설이 사실에 가깝든, 쿠샤리는 알렉산드리아가 코스모폴리탄 항구 도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음식이다. 닫힌 도시에서는 절대 탄생할 수 없는 요리다.


🔬 영양과 과학
렌틸·무화과·커민 — 파라오가 선택한 재료들의 과학
렌틸 — 식물성 단백질의 완성형

렌틸 100g에는 단백질 약 26g이 들어 있다. 소고기 100g의 단백질 함량(약 26g)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더 중요한 것은 렌틸에는 지방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칼로리 대비 영양 밀도가 식물성 식품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한다. 렌틸이 고대부터 가난한 이들의 주식이었던 이유는 경제성이지만,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지중해 문명을 지탱한 이유는 영양학적 완성도에 있다.

렌틸의 핵심 영양소는 세 가지다. 첫째, 철분(iron). 렌틸 1컵(약 200g, 조리 후)에는 철분 약 6.6mg이 들어 있어 성인 여성 하루 권장량의 약 37%를 공급한다. 식물성 철분(비헴철, non-heme iron)은 동물성 철분보다 흡수율이 낮지만, 렌틸에 풍부한 비타민 C와 함께 먹으면 흡수율이 유의미하게 올라간다. 이집트 전통 렌틸 요리에 레몬즙을 곁들이는 관습은 단순한 맛의 문제가 아니라 수천 년에 걸친 경험적 영양 최적화의 결과다. 둘째, 엽산(folate). 렌틸은 식물성 식품 중 엽산 함량이 가장 높은 것 중 하나다. 세포 분열과 DNA 합성에 필수적인 엽산은 임신 중 특히 중요하며, 고대 이집트에서 임신부에게 렌틸 수프를 권했다는 기록은 이 경험적 지식을 반영한다. 셋째, 식이섬유. 렌틸 1컵에는 식이섬유 약 16g이 들어 있어, 장내 미생물 생태계를 지원하고 혈당 상승을 완만하게 한다.

렌틸의 조리 과학에서 주목할 점은 파티고닌(phytate)과의 관계다. 렌틸에는 미네랄 흡수를 방해하는 항영양소 피트산(phytic acid)이 들어 있다. 그러나 물에 불리거나(soaking) 발아시키면 피트산 함량이 크게 줄고 철분·아연 흡수율이 개선된다. 이집트 전통 조리법에서 렌틸을 전날 밤부터 물에 담가두는 관습은 이 과학적 원리를 오랜 실천으로 터득한 것이다.

렌틸은 슈퍼푸드다 - 출처 : https://www.herbazest.com/herbs/lentil
커민 — 5천 년을 살아남은 향신료의 분자 과학

커민의 독특한 향미는 주성분 쿠미날데히드(cuminaldehyde, 4-isopropylbenzaldehyde)에서 온다. 이 방향족 알데히드가 커민 특유의 흙냄새와 따뜻한 스파이시 향을 만든다. 고대 이집트의 에베르스 파피루스에 소화 치료제로 기록된 커민의 효능은 현대 과학으로 부분적으로 검증된다. 쿠미날데히드는 위산 분비를 자극하고 담즙 분비를 촉진해 소화를 돕는 실제 기능이 있다. 항균 활성도 확인된다. 커민 에센셜 오일은 다수의 식중독 원인균에 대해 억제 효과를 나타낸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냉장 보관이 없던 시대, 커민을 음식에 넣는 것은 부패를 늦추는 실용적 보존 전략이었다.

커민은 이집트에서 미라 제작(mummification)에도 쓰였다. 시신의 방부 처리 과정에서 커민의 항균·항곰팡이 성분이 활용됐다는 것이 고고학 분석으로 확인됐다. '파라오의 향신료'가 단순히 맛 때문에만 숭배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커민의 철분 함량도 주목할 만하다. 커민 1티스푼(약 2g)에는 철분 약 1.4mg이 들어 있다. 향신료 한 꼬집이 철분 보충에 기여하는 셈이다. 커민을 철분이 풍부한 렌틸과 함께 쓰는 이집트 전통 조리는 감칠맛만이 아니라 영양 시너지도 갖추고 있다.

커민 - 출처 : https://www.herbazest.com/herbs/cumin
무화과 — 당(糖)의 집적체가 품은 역설

무화과는 생과(生果)와 건과(乾果)의 영양 프로필이 크게 다르다. 생 무화과 100g의 당 함량은 약 16g인 반면, 건조 무화과 100g에는 당이 약 64g까지 농축된다. 고대부터 무화과가 에너지 식품으로 취급된 것은 이 당 농도 때문이다. 로마 군단이 행군 식량으로 건조 무화과를 챙긴 것도,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에 무화과를 넣은 것도 이 풍부한 에너지 공급원으로서의 가치를 인식한 결과다.

그러나 무화과의 과학적으로 더 흥미로운 부분은 당 이외에 있다. 무화과는 피신(ficin)이라는 단백질 분해 효소를 함유한다. 피신은 파파야의 파파인(papain)과 비슷하게 고기의 단백질을 가수분해해 조직을 부드럽게 만든다. 고대 이집트에서 무화과 잎을 고기에 감싸거나 무화과 즙을 고기에 바르던 관습은 이 효소 작용을 경험적으로 터득한 것이다. 또한 무화과는 칼슘 함량이 과일 중 두드러진다. 건조 무화과 100g에는 칼슘이 약 162mg 들어 있어 같은 무게의 우유에 맞먹는다. 유제품 섭취가 제한적인 문화권에서 무화과가 칼슘 공급원 역할을 해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무화과 생과, 건과 차이 - 출처 : https://kr.pinterest.com/pin/common-fig-vs-raisin-a-detailed-nutrition-comparison--95349717098475671/
재료 핵심 영양소 핵심 화학 성분 전통 조리의 과학적 의미
렌틸 단백질 26g/100g, 엽산, 철분, 식이섬유 16g/컵 피트산(항영양소) → 불림으로 감소 전날 밤 불리기 = 피트산 제거; 레몬즙 첨가 = 비헴철 흡수율 향상
커민 철분(1.4mg/tsp), 망간, 항산화 성분 쿠미날데히드 → 향미 + 소화 촉진 + 항균 미라 방부제 사용 = 항균·항곰팡이 활성 실증; 냉장 없던 시대 방부 조미료
무화과(건) 칼슘 162mg/100g, 당 64g/100g, 칼륨 피신(ficin) 단백질 분해 효소 무화과 잎으로 고기 싸기 = 피신 연육 작용; 유제품 대체 칼슘 공급원
쿠샤리 (조합) 탄수화물·단백질·식이섬유 복합 균형 렌틸 식이섬유 + 쌀 전분 = 혈당 완충 효과 고GI 쌀 + 저GI 렌틸 배합 → 혈당 급등 완화. 파스타 추가 = 문화 혼합의 산물

🍽️ 대표 요리와 활용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밥상들
🥣 쿠샤리(Kushari) — 제국들이 한 그릇에 쌓인 음식

쿠샤리를 제대로 만드는 순서는 층위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먼저 렌틸을 따로 삶는다. 쌀과 버미첼리(가는 파스타)를 기름에 볶다가 물을 부어 쌀밥 짓듯 익힌다. 마카로니는 따로 삶아둔다. 양파는 아주 얇게 썰어 바삭해질 때까지 충분한 기름에 천천히 튀긴다. 이것이 쿠샤리의 정수다 — 튀긴 양파의 캐러멜화된 단맛이 전체 맛의 기둥이다. 토마토 소스는 마늘, 커민, 식초를 넣고 따로 끓인다. 마늘 식초 소스(다아, Da'a)는 생마늘을 으깨 식초·레몬즙·소금을 섞어 만든다. 그릇에 쌀밥을 먼저 담고, 렌틸, 마카로니, 병아리콩 순으로 쌓은 뒤 튀긴 양파를 얹고 소스를 각자 기호에 맞게 뿌린다. 매운 고추 소스를 원하는 만큼 추가한다.

쿠샤리는 레스토랑 음식이 아니다. 알렉산드리아의 길거리 전문점에서는 대형 솥에 각 재료를 미리 준비해두고 주문이 들어오는 즉시 쟁반에 쌓아 낸다. 빠르고, 싸고, 든든하다. 이집트에서 쿠샤리는 '먹을 것이 없을 때 먹는 음식'이 아니라 '언제 먹어도 맛있는 음식'의 지위를 갖는다. 알렉산드리아식은 카이로식에 노란 렌틸과 삶은 달걀을 추가한다. 그 차이만큼 도시의 역사도 다르다.

쿠샤리 - 출처 : https://www.curiouscuisiniere.com/kushari/
💡 소금꽃한스푼의 한 스푼

집에서 쿠샤리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튀긴 양파다. 성급하게 튀기면 양파가 태워지거나 반쯤 날것으로 남는다. 낮은 불에서 20~30분을 들여 천천히 갈색이 될 때까지 튀겨야 쿠샤리 특유의 단맛이 산다. 토마토 소스에 커민 1티스푼과 식초 1큰술을 넣는 것이 이집트식 핵심이다. 렌틸은 전날 밤 물에 불려두면 삶는 시간도 줄고 영양 흡수도 좋아진다. 다 완성된 후 레몬즙을 뿌려 먹으면 맛도 상큼해지고 철분 흡수도 함께 올라간다.

🥣 샤르바 아다스(Shorba Adas) — 커민 렌틸 수프

이집트의 렌틸 수프 샤르바 아다스(Shorba Adas)는 아랍어로 '렌틸 수프'를 뜻한다. 빨간 렌틸을 양파·당근·마늘과 함께 끓인 뒤 믹서에 곱게 갈아 벨벳처럼 만드는 것이 기본이다. 여기에 커민과 고수 가루를 넣고 마지막에 레몬즙을 짜 넣는다. 레몬의 산이 커민과 반응해 향미가 한층 살아나는 동시에, 앞서 설명한 비헴철 흡수율 향상 효과도 일어난다. 표면에 올리브유를 한 방울 떨어뜨리고 카이엔 페퍼 한 꼬집으로 마무리한다. 수천 년 전 이집트인이 먹던 렌틸 수프의 현재 버전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이 수프는 겨울 저녁의 음식이다. 지중해에 면해 있어도 알렉산드리아의 겨울은 꽤 쌀쌀하고 비가 내린다. 큰 냄비에 수프를 끓여두고 온 가족이 나눠 먹는다. 그 광경 자체가 3,00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샤르바 아다스 - 출처 : https://www.emperorakbar.com/blogs/recipes/shorbat-adas-lentil-soup-ramadan-special?srsltid=AfmBOoo49QbjKsCkJpLdZF111nEU-_Bsm8d3PeUEM4RnMs-GiJDLFewj
💡 소금꽃한스푼의 한 스푼

렌틸 수프의 비결은 마지막 마무리에 있다. 수프를 완성한 뒤 작은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커민 씨앗을 볶아 향을 낸 뒤 수프 위에 부으면 향미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올라간다. 이것을 이집트어로 '타들리아(Tadliya)'라 부르는 마무리 기름 향내기 기법이다. 빨간 렌틸을 쓰면 갈 필요도 없이 30분이면 부드럽게 풀어진다. 레몬은 불을 끄고 나서 짜 넣어야 산이 날아가지 않아 상큼함이 살아있다.

🫐 풀 메다메스(Ful Medames) — 알렉산드리아의 아침

풀 메다메스(Ful Medames)는 이집트 최고(最古)의 음식 중 하나다. 누에콩(fava bean)을 오래 삶아 으깨고, 레몬즙·올리브유·마늘·커민·소금으로 간한다. 아침 식사로 아이쉬(이집트 납작빵)에 찍어 먹는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 음식이 알렉산드리아 골목 식당들에서 새벽부터 팔린다. 이집트인들은 이것을 '국민 아침 식사'라 부른다. 고대 이집트의 사카라 고고학 발굴에서 출토된 조리 흔적과 현재 알렉산드리아 식당의 풀 메다메스는 핵심 재료가 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3,000년짜리 연속성의 증거다.

풀 메다메스 - 출처 : https://www.washingtonpost.com/recipes/ful-medammes-egyptian-style-fava-beans/

항구의 식탁 — 다음 이야기
지중해가 남긴 것

알렉산드리아의 역설은 이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침략자를 받아들인 도시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음식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그리스인이 오고 로마인이 오고 아랍인이 오고 오스만이 왔다. 그들은 언어를 바꾸고 종교를 바꾸고 지배자의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아무도 렌틸 수프의 레몬즙 한 방울과 커민 한 꼬집을 없애지 못했다.

쿠샤리는 그 모든 지배자들이 조금씩 남긴 것들의 합산이다. 렌틸은 파라오의 것이고, 파스타는 이탈리아 이민자의 것이고, 커민 향 토마토 소스는 오스만의 것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지배자를 소화했고, 그 소화의 결과가 밥상 위에 남았다. 음식은 승자의 기록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기록이다.

다음 화는 한국으로 온다. 해방 이후 피란민과 무역항이 만든 도시, 부산. 밀면과 어묵과 씨앗호떡이 어떻게 전쟁과 이주의 기억으로부터 태어났는지를.

"지배자는 왔다가 떠났지만
렌틸 수프의 커민 향은 남았다.
알렉산드리아의 밥상은
제국들의 소화가 빚어낸
3천 년의 기억이다."

✅ Fact-check
항목 내용 출처
알렉산드리아 건설 연도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 서북부 어촌 라코티스 부지에 도시 건설 명령. 기원전 305년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아 왕조 개창. 전성기 인구는 50만~100만으로 추산. Encyclopædia Britannica, Alexandria; P. M. Fraser, Ptolemaic Alexandria, Clarendon Press (1972)
알렉산드리아의 향신료 무역 허브 지위 기원전 80년 로마 지배 이후 알렉산드리아는 인도·아라비아 향신료의 지중해 최대 집산지였음. 로마의 인도 직항 무역로 개통(기원후 1세기) 이후 더욱 확대. 프롤레마이오스 시대 무역항으로서의 독점적 지위 확인. Encyclopædia Britannica, Spice Trade; History Skills, Alexandria: Most Important City in the Ancient World
커민의 에베르스 파피루스 기록 기원전 1550년경 작성된 에베르스 파피루스(Ebers Papyrus)에 커민이 소화 치료 처방 성분으로 기록. 커민 씨앗이 이집트 피라미드 및 무덤에서 발굴된 것으로 보고됨. 람세스 3세의 커민 봉헌 기록도 문헌상 확인. UC Davis Nutritional Geography, Cumin; HerbaZest, Cumin: History and Uses; Learning Herbs, Cumin Uses and Plant Profile
쿠샤리의 기원과 재료 유입 쿠샤리의 정확한 기원은 학계 논쟁 중. 유력한 설은 19세기 영국 식민기 인도 노동자 경유 키치리(khichdi) 전래설, 이탈리아 이민자 파스타 추가설의 복합 기원. 렌틸·쌀의 고대 이집트 사용은 고고학적으로 확인. 알렉산드리아식은 노란 렌틸과 삶은 달걀 사용이 특징. Smithsonian Magazine, The Layered History of Koshary (2026); Lins Food, Egyptian Koshari
렌틸의 단백질 및 철분 함량 생 렌틸 100g당 단백질 약 26g. 조리된 렌틸 1컵(약 200g) 기준 철분 약 6.6mg (성인 여성 권장량 대비 약 37%). 식이섬유 약 16g/컵. 피트산(phytic acid)은 불리기·발아를 통해 유의미하게 감소. USDA FoodData Central; 農林水産省 日本食品標準成分表
커민 주성분 쿠미날데히드 커민 에센셜 오일의 주성분은 쿠미날데히드(cuminaldehyde). 항균 활성 및 소화 촉진 효과 다수 연구에서 확인. 커민의 미라 방부 처리 사용은 이집트 고고학 문헌에서 보고됨. HerbaZest, Cumin; Bespoke Spices, History of Cumin; IOSR Journal of Pharmacy and Biological Sciences, Pharmacological Activities of Cuminum cyminum (2016)
무화과의 피신(ficin) 효소 무화과(Ficus carica)의 유액에는 단백질 분해 효소 피신(ficin) 함유. 파파인과 유사한 연육 작용. 건조 무화과 100g당 칼슘 약 162mg. 고대 이집트 벽화 및 왕묘 부장품에서 무화과 다수 확인. USDA FoodData Central; Elite Plus Magazine, Egyptian Culinary History
641년 아랍 정복 641년(혹은 642년) 이슬람 장군 아므르 이븐 알 아스의 알렉산드리아 정복. 이후 이집트 정치 중심은 푸스타트(현 카이로)로 이동. 알렉산드리아는 항구 도시로서 기능 유지. 아랍 정복자들이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나 등대를 의도적으로 파괴했다는 13세기 기록은 현대 역사학자들에 의해 사실 아닌 것으로 평가됨. Encyclopædia Britannica, Alexandria History; Art News, Alexandria: A Guide to Egypt's Ever-Changing City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