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와 식재료 (Food & History)

[궁정이 바꾼 식탁 EP.7] 에스코피에와 카렘 — 왕실 요리사가 버터·크림소스 요리를 만든 방법

by 소금꽃한스푼 2026. 5. 16.
 
궁정이 바꾼 식탁 — 왕권과 요리
Episode 7 / 8
에스코피에와 카렘
왕실 요리사가 버터·크림소스 요리를 만든 방법
 

1833년 파리,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채 안 됐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만찬을 준비하던 한 요리사가 뜨거운 소스를 다루다 손에 화상을 입었다. 그는 붕대를 감은 채 주방으로 돌아갔다. 그 요리사의 이름은 마리-앙투안 카렘(Marie-Antoine Carême). 나폴레옹의 수석 요리사이자 러시아 황제, 영국 섭정 왕자, 로스차일드 가문의 만찬을 모두 책임진 인물이었다. 그가 그날 완성한 소스의 레시피는 훗날 프랑스 요리의 기초가 됐다.

반세기 뒤, 런던 사보이 호텔(Savoy Hotel)의 주방장 오귀스트 에스코피에(Auguste Escoffier)는 카렘의 방대한 소스 체계를 해체하고 다시 쌓았다. '주방의 황제(Emperor of Chefs)'라 불린 이 남자는 프랑스 요리를 왕궁의 연회장에서 호텔의 식당으로 끌어내렸고, 그 과정에서 오늘날 레스토랑이 작동하는 방식을 만들었다.

버터(beurre)크림(crème). 프랑스 고전 요리를 상징하는 이 두 재료는 어떻게 왕실 주방에서 체계화되어 세계 요리의 문법이 됐을까. 그리고 두 요리사의 이름이 붙은 소스들은 왜 지금도 조리사 시험의 필수 과목으로 남아있을까.

마리 앙투안 카렘 -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A6%AC%EC%95%99%ED%88%AC%EC%95%88_%EC%B9%B4%EB%A0%98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Auguste_Escoffier

📜 역사와 문화
카렘 — 거리의 아이가 왕의 요리사가 되기까지
혁명 이후의 주방 — 귀족의 요리사들이 거리로

마리-앙투안 카렘(1784~1833)은 파리의 극빈층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거리에 버려졌다. 그를 주운 것은 파리의 한 레스토랑 주인이었다. 프랑스 대혁명(1789)은 아이러니하게도 카렘 같은 인물에게 기회를 열어주었다. 귀족들이 단두대로 사라지면서 그들의 주방을 채웠던 최고 수준의 요리사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들은 파리 거리에 레스토랑을 열었고, 왕실 주방에서만 존재하던 고급 요리가 처음으로 돈을 낸 일반인 앞에 놓였다. 근대적 의미의 레스토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카렘은 파리 최고의 파티시에(pâtissier) 아래서 수련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은 프랑스 외무장관 탈레랑(Talleyrand)이었다. 탈레랑은 나폴레옹의 외교를 뒷받침하는 만찬을 준비하는 데 카렘을 기용했다. 훗날 카렘은 이렇게 회고했다. "탈레랑 공은 진정한 미식가였다. 그는 내게 요리를 통해 외교를 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카렘은 영국 섭정 왕자(훗날 조지 4세),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오스트리아 빈 회의의 만찬 테이블까지 책임졌다. 유럽의 새 국경이 그어지던 그 테이블 위에 카렘의 소스가 있었다.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 -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C%83%A4%EB%A5%BC%EB%AA%A8%EB%A6%AC%EC%8A%A4_%EB%93%9C_%ED%83%88%EB%A0%88%EB%9E%91%ED%8E%98%EB%A6%AC%EA%B3%A0%EB%A5%B4
카렘은 러시아식으로 코스요리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 출처 : https://www.andreapenrose.com/inside-the-plots/marie-antoine-careme/
4대 모체 소스 — 카렘이 세운 요리의 문법

카렘의 가장 큰 업적은 프랑스 요리의 소스 체계를 처음으로 분류하고 체계화한 것이다. 그는 프랑스 요리의 모든 소스가 네 가지 모체 소스(sauce mère)에서 파생된다는 원리를 제시했다. 에스파뇰(Espagnole): 갈색 송아지 육수를 베이스로 한 진한 갈색 소스. 벨루테(Velouté): 흰 육수(닭·생선·송아지)에 루(roux)를 결합한 크림 빛 소스. 베샤멜(Béchamel): 우유와 버터·밀가루 루의 결합. 알망드(Allemande): 벨루테에 달걀노른자와 크림을 가한 소스. 이 체계는 훗날 에스코피에가 다섯 번째 소스 토마토 소스홀랜다이즈(Hollandaise)를 추가하면서 현재의 5대 모체 소스 체계로 완성됐다.

카렘은 요리를 건축에 비유했다. 그는 설탕 공예와 버터로 피라미드, 신전, 탑 모양의 화려한 구조물 — 피에스 몽테(pièce montée) — 을 만들어 연회 테이블을 장식했다. 왕실 연회의 밥상은 먹기 위한 것이기 이전에 보기 위한 예술품이었고, 카렘은 그 예술의 설계자였다. 그가 남긴 저서 프랑스 요리의 예술(L'Art de la cuisine française)은 5권짜리 대작으로, 그가 완성하지 못하고 48세에 요절하며 미완으로 남았다. 사인은 석탄 연기로 인한 폐 손상이었다. 일생을 뜨거운 화덕 앞에서 보낸 대가였다.

우측아래부터 반시계방향으로. 에스파뇰, 벨루테, 토마토, 베샤멜, 홀랜다이즈 - 출처 : https://www.hodyacademy.com/post/cap-sauces
" 요리의 숯불은 우리를 죽인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만들어야 한다.
— 마리-앙투안 카렘(Marie-Antoine Carême), 프랑스 요리의 예술(L'Art de la cuisine française)
에스코피에 — 왕실을 호텔로 옮긴 남자

오귀스트 에스코피에(1846~1935)가 등장한 것은 카렘 사후 반세기가 지났을 때다. 에스코피에는 카렘의 거대하고 복잡한 고전 요리 체계를 단순화했다. 피에스 몽테처럼 보기 위한 구조물을 치우고, 요리 본연의 맛과 신선한 재료에 집중했다. 장식적 목적으로 올려진 먹지 않는 가니시를 없앴고, 소스의 종류는 줄이되 각각의 완성도를 높였다.

에스코피에의 무대는 호텔이었다. 호텔 경영자 세자르 리츠(César Ritz)와 함께 런던 사보이(1890), 런던 리츠(1906), 파리 리츠(1898) 호텔의 주방을 이끌었다. 이 호텔들은 귀족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성공한 사업가, 배우, 예술가, 신흥 부르주아지들이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에스코피에는 이 새로운 손님들에게 맞는 요리 언어를 만들었다. 요리를 순서대로 내는 서비스 알라 뤼스(service à la russe) 방식 — 요리를 동시에 테이블에 올리던 전통 방식(service à la française) 대신 코스별로 순서대로 제공하는 방식 — 이 에스코피에의 호텔에서 정착되면서 오늘날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 구조가 완성됐다.

요리를 순서대로 내는 방식 - 출처 : https://www.gw2ru.com/russian-kitchen/234840-service-a-la-russe-history
 
 
1789년

프랑스 대혁명. 귀족 주방 요리사들이 일자리를 잃고 파리에 레스토랑을 개업. 왕실 요리가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됨. 근대 레스토랑의 탄생.

 
1803~1833년

카렘의 전성기. 탈레랑·나폴레옹·영국 섭정 왕자·알렉산드르 1세 등 유럽 권력자들의 만찬을 책임. 4대 모체 소스 체계 정립. L'Art de la cuisine française 집필 중 사망.

 
1890~1907년

에스코피에, 런던 사보이·카를턴·리츠 호텔 주방장 역임. 빅토리아 여왕·에드워드 7세 등 왕실 연회 담당. 르 기드 퀴리네르(Le Guide Culinaire)(1903) 출판. 오늘날에도 프랑스 요리의 바이블로 사용.

 
20세기 ~ 현재

에스코피에의 브리가드 시스템(brigade de cuisine)이 전 세계 레스토랑 주방 조직의 표준으로 정착. 5대 모체 소스가 조리사 국가자격 시험의 필수 과목이 됨. 누벨 퀴진(1970년대)의 반발을 거치면서도 고전 프랑스 요리의 골격은 유지.

브리가드 시스템 — 주방을 군대처럼

에스코피에의 또 다른 유산은 주방 조직 체계다. 그는 보불전쟁(1870~1871) 종군 경험에서 착안해 주방을 군대식으로 재편했다. 브리가드 드 퀴진(brigade de cuisine)이라 불리는 이 체계는 수석 요리사(Chef de Cuisine) 아래 소스 담당(Saucier), 구이 담당(Rôtisseur), 생선 담당(Poissonnier), 채소 담당(Entremetier), 찬 요리 담당(Garde-Manger), 제과 담당(Pâtissier) 등 전문 파트를 두는 분업 시스템이다. 오늘날 어느 나라의 주방에 들어가더라도 만나는 '셰프'와 '수셰프'라는 직급 체계는 에스코피에가 사보이 호텔 주방에서 만든 것이 그대로 굳어진 결과다.

주방의 직계도 - 출처 : https://www.highspeedtraining.co.uk/hub/kitchen-hierarchy-brigade-de-cuisine/

🔬 영양과 과학
버터와 크림 — 왕실 주방의 두 기둥
버터 — 유화(乳化)의 화학

버터는 우유 지방을 기계적으로 교반(churning)해 지방구막이 파괴되면서 지방이 서로 응집되어 만들어진다. 완성된 버터의 구성은 유지방 약 80%, 수분 약 16~17%, 유단백질과 유당 약 2~3%다. 프랑스 고전 요리에서 버터가 핵심이 된 이유는 단순한 맛 이상의 물리화학적 기능에 있다. 버터는 유화제(emulsifier)이자 증점제(thickener)이자 향미 매개체(flavour carrier)다.

버터 소스를 만드는 핵심 기술인 몽테 오 뵈르(monter au beurre) — 소스에 차가운 버터를 조각조각 넣으며 계속 저어 녹이는 방법 — 는 유화의 원리를 이용한다. 차가운 버터를 뜨거운 소스에 조금씩 가하면 버터가 녹으면서 방출된 유지방이 소스의 수분과 결합해 미세한 수중유형(O/W) 에멀션을 형성한다. 버터 속 레시틴(lecithin)이 유화제 역할을 한다. 이 에멀션이 소스에 광택과 크리미한 질감을 주며, 지용성 향미 성분을 소스 전체에 고르게 분산시킨다. 온도가 너무 높아지면(약 70°C 이상) 에멀션이 깨지며 기름이 분리되는데, 이것을 막는 것이 프랑스 소스 조리사의 핵심 기술이었다.

몽테 오 뵈르 - 출처 : https://www.qooq.com/techniques/monter-au-beurre
루(Roux) — 소스의 뼈대

카렘이 체계화한 소스 대부분의 기초에는 루(roux)가 있다. 루는 밀가루와 버터를 1:1 비율로 함께 가열한 것이다. 밀가루의 전분(amylose·amylopectin)이 버터 지방에 의해 코팅되면서 분산되고, 이후 육수나 우유 같은 수분이 더해지면 전분이 호화(gelatinization)되며 점도를 만든다. 이때 밀가루를 버터와 먼저 익히지 않으면 전분 분자들이 뭉쳐 덩어리(lumping)가 생긴다. 루를 얼마나 오래 볶느냐에 따라 화이트 루(white roux, 베샤멜 기반), 블론드 루(blonde roux, 벨루테 기반), 브라운 루(brown roux, 에스파뇰 기반)로 나뉘며 색과 향이 달라진다. 오래 볶을수록 마이야르 반응으로 인한 견과류 향이 강해지고 증점 능력은 줄어든다.

에스코피에는 카렘의 루 기반 소스에 더해 젤라틴(gelatin)리에종(liaison, 달걀노른자+크림 혼합물)을 활용한 소스를 발전시켰다. 특히 오랜 시간 끓여 추출한 뼈의 콜라겐에서 만들어지는 젤라틴은 소스의 결합력과 윤기를 동시에 해결했다. 오늘날 고급 레스토랑의 '글라스 드 비앙드(glace de viande, 육수를 극도로 졸인 농축 진액)'는 이 원리의 현대적 계승이다.

루(Roux) - 출처 : https://www.thekitchn.com/roux-recipe-23003997
모체 소스 베이스 증점 원리 주요 파생 소스
베샤멜(Béchamel) 우유 + 화이트 루 전분 호화 모르네이, 크림소스, 수비즈
벨루테(Velouté) 흰 육수 + 블론드 루 전분 호화 + 젤라틴 수프렘, 알뷔페라, 노르망디
에스파뇰(Espagnole) 갈색 육수 + 브라운 루 전분 호화 + 마이야르 향미 드미글라스, 보르들레즈, 샤쇠르
홀랜다이즈(Hollandaise) 달걀노른자 + 정제 버터 달걀 단백질 + 버터 유화 베아르네즈, 말테즈, 무슬린
토마토 소스 토마토 + 육수 펙틴·단백질 농축 포르투게즈, 스페니시
클라리파이드 버터와 게 버터 — 정제의 과학

프랑스 왕실 주방은 버터를 그대로 쓰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클라리파이드 버터(clarified butter, beurre clarifié)는 버터를 저온에서 천천히 녹여 수분과 유단백질을 제거하고 순수한 지방만 남긴 것이다. 수분과 유단백질이 제거되면 발연점이 일반 버터의 약 175°C에서 약 250°C까지 높아져 고온 조리가 가능해진다. 인도의 기(ghee)와 같은 원리다. 또한 냉장 보관 없이도 수개월간 보존이 가능해 왕실의 원정이나 장기 연회 준비에 실용적이었다.

에스코피에가 특히 발전시킨 것은 뵈르 블랑(beurre blanc)이다. 화이트 와인과 식초를 샬롯과 함께 졸인 뒤 차가운 버터를 조각씩 가해 만드는 에멀션 소스로, 버터가 소스에 흡수되며 만드는 실크 같은 질감은 오늘날도 프랑스 생선 요리의 전형적인 소스로 쓰인다. 뵈르 블랑의 성패는 온도 조절이다. 버터를 추가하는 동안 소스의 온도가 80°C를 넘으면 에멀션이 깨지고, 60°C 아래로 떨어지면 버터가 제대로 유화되지 않는다.

정제 버터 - 출처 : https://www.landolakes.com/recipe/6887/clarified-butter/

🍽️ 대표 요리와 활용
왕실 요리사가 남긴 조리법들
🍑 페슈 멜바(Pêche Melba) — 오페라 가수를 위한 디저트

에스코피에가 남긴 요리 중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직접 이름 붙인 디저트 페슈 멜바(Pêche Melba)다. 1892년 런던 사보이 호텔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오페라 가수 넬리 멜바(Nellie Melba)가 공연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 에스코피에는 그녀를 위해 즉석에서 디저트를 만들었다. 복숭아를 바닐라 시럽에 데치고, 바닐라 아이스크림 위에 올린 뒤 라즈베리 퓨레 소스를 뿌린 것이었다. 처음에는 얼음 조각으로 만든 백조 위에 담아 냈다는 기록이 있다. 단 하나의 손님을 위해 즉흥으로 만든 이 디저트는 지금도 전 세계 레스토랑 메뉴에 있다.

에스코피에는 이외에도 복숭아를 담는 쿠프(coupe) 형식의 디저트, 신선한 과일과 크림을 조합한 프루이 라 크렘(fruits à la crème) 시리즈를 통해 화려하고 무거웠던 왕실 디저트를 신선하고 가벼운 방향으로 전환했다.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것이 최고의 요리라는 그의 철학은 20세기 누벨 퀴진(nouvelle cuisine) 운동이 에스코피에를 존경하면서도 반발의 대상으로 삼는 역설적 이유가 됐다.

페슈 멜바 - 출처 : https://mrcuisto.com/recipes/peches-melba-miel
💡 소금꽃한스푼의 한 스푼

집에서 간단한 버터 소스를 만들 때 '버터가 분리된다'는 문제를 자주 겪는다면 온도 때문이다. 소스 냄비를 불에서 내려놓은 상태에서 차가운 버터 조각을 넣고 저으면 분리 없이 매끄럽게 유화된다. 이미 분리됐다면 얼음물 몇 방울을 넣고 빠르게 저으면 일부 회복된다. 가정에서 홀랜다이즈를 만들 때는 중탕(bain-marie)을 사용해 달걀노른자가 스크램블되는 것을 막는 것이 핵심이다. 냄비 바닥이 물에 직접 닿지 않도록 하고, 볼의 온도를 손으로 느끼며 조절하면 된다.

🥩 베아르네즈 소스(Sauce Béarnaise) — 왕의 소스

베아르네즈는 홀랜다이즈 소스의 파생으로, 에스코피에 시대에 프랑스 스테이크 소스의 왕좌를 차지한 소스다. 화이트 와인 식초, 샬롯, 타라곤, 처빌을 함께 졸여 만든 리덕션(reduction)에 달걀노른자를 거품 낸 후 정제 버터를 조금씩 가해 유화시키고, 신선한 타라곤 잎으로 마무리한다. 이름의 유래는 앙리 4세가 태어난 베아른(Béarn) 지방이라는 설이 있지만, 실제로 처음 기록된 것은 1830년대 파리의 한 식당에서다. 어쨌든 왕의 이름을 딴 소스가 된 것은 그 위상을 말해준다.

베아르네즈의 과학은 홀랜다이즈와 동일한 원리, 즉 달걀노른자의 레시틴이 지방과 수분 사이의 유화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리덕션에 포함된 산(초산, acetic acid)이 달걀 단백질의 변성 온도를 약간 높이는 완충 효과를 내 홀랜다이즈보다 조금 더 안정적이다. 이 미세한 차이가 현장 주방에서는 베아르네즈를 홀랜다이즈보다 다루기 쉽게 만든다.

베아르네즈 소스 - 출처 : https://www.seriouseats.com/foolproof-bearnaise-sauce-recipe
💡 소금꽃한스푼의 한 스푼

에스코피에의 소스 체계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드미글라스(demi-glace)부터 시작해보자. 소고기 뼈나 사태를 오래 끓인 육수를 반으로 졸이면 된다. 이것만 냉동 보관해두면 스테이크 소스, 찜 요리 소스, 국물 베이스를 언제든 수준 높게 만들 수 있다. 집에서 만드는 가장 쉬운 '버터 소스'는 팬에 스테이크를 구운 뒤 남은 육즙에 버터 한 조각, 마늘, 타임을 넣고 버터가 녹으면서 거품을 내는 바스팅(basting)이다. 에스코피에가 사보이 호텔에서 했던 것과 원리는 같다.


결말
왕실 없이도 살아남은 소스들

카렘이 섬긴 왕들은 모두 사라졌다.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에서 숨을 거뒀고, 알렉산드르 1세의 러시아 제국은 1917년 혁명으로 무너졌다. 에스코피에가 요리를 차려낸 빅토리아 여왕과 에드워드 7세의 대영제국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해체됐다. 그러나 두 요리사가 왕실 주방에서 완성한 소스들은 여전히 살아있다.

1970년대 폴 보퀴즈(Paul Bocuse), 미셸 게라르(Michel Guérard) 등 프랑스 요리사들이 주도한 누벨 퀴진(nouvelle cuisine) 운동은 에스코피에의 무거운 크림·버터 소스에 반기를 들었다. 재료를 덜 익히고, 더 가볍고, 더 창의적으로. 그 반발이 한 시대를 지배했다. 그러나 21세기에 다시 고전 프랑스 요리로의 회귀가 일어나고 있다. 에스코피에의 르 기드 퀴리네르는 여전히 절판되지 않고 팔리며, 전 세계 조리사 면허 시험은 여전히 5대 모체 소스의 조리법을 묻는다.

더 흥미로운 역전도 있다. 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소스 중 하나인 '데미글라스 소스'는 에스파뇰에서 온 것이고, 한국인이 즐겨 찾는 함박스테이크 위의 갈색 소스가 바로 거기서 파생됐다. 일본 양식(洋食) 문화를 통해 변형 흡수된 에스코피에의 소스가 한국 가정식의 일부가 된 것이다. 왕실 주방의 레시피가 지구 반대편 밥상 위에 놓이기까지, 요리는 예상치 못한 경로로 세계를 여행한다.

누벨 퀴진은 정통 프랑스방식의 요리를 벗어나고자 한다 - 출처 : https://www.gourmandbreaks.com/blog/what-is-nouvelle-cuisine/
"카렘은 소스의 문법을 만들었고,
에스코피에는 그 문법으로
세계가 읽을 수 있는 책을 썼다.
왕들은 사라졌지만, 소스는 남았다."

✅ Fact-check
항목 내용 출처
카렘의 생애와 경력 1784년 파리 출생, 1833년 사망(48세). 탈레랑·조지 4세(영국 섭정 왕자)·알렉산드르 1세·로스차일드 가문 근무 기록 확인 Ian Kelly, Cooking for Kings: The Life of Antonin Carême (2003); L'Art de la cuisine française au XIXe siècle, Carême (1833~1835)
카렘의 4대 모체 소스 에스파뇰·벨루테·베샤멜·알망드 4종 체계 정립. 에스코피에가 알망드를 벨루테의 파생으로 재분류하고 토마토·홀랜다이즈를 추가해 5대 체계 완성 Auguste Escoffier, Le Guide Culinaire (1903); Harold McGee, On Food and Cooking (2004)
에스코피에 사보이 호텔 재직 1890~1897년 런던 사보이 호텔 주방장. 세자르 리츠와 함께 런던 카를턴(1899)·파리 리츠(1898) 등 유럽 최고급 호텔 주방 운영 Timothy Shaw, The World of Escoffier (1994); Escoffier 공식 재단 아카이브
페슈 멜바 기원 1892년(혹은 1893년) 사보이 호텔에서 성악가 넬리 멜바(Dame Nellie Melba)를 위해 에스코피에가 고안. 복숭아·바닐라 아이스크림·라즈베리 소스 구성 Escoffier, Memories of My Life (1997); Le Guide Culinaire 디저트 섹션
루(roux)의 증점 원리 밀가루 전분(아밀로스·아밀로펙틴)이 수분과 열에 의해 팽윤·호화되어 점도 형성. 버터 지방이 전분 분산 돕고 덩어리 방지 Harold McGee, On Food and Cooking (2004); Heston Blumenthal, The Fat Duck Cookbook (2008)
클라리파이드 버터 발연점 일반 버터 발연점 약 175°C, 클라리파이드 버터 약 250°C. 수분·유단백질 제거로 발연점 상승 USDA Food Data Central; McGee (2004), On Food and Cooking, p.40~42
서비스 알라 뤼스 정착 코스별 순서 제공 방식(service à la russe)이 19세기 중반 유럽 상류층 만찬에서 전통 방식(service à la française)을 대체. 에스코피에 호텔 주방에서 표준으로 정착 Mennell, All Manners of Food (1985); The Oxford Companion to Food, Davidson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