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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토의 맛 (Taste of Terroir)

[가쓰오부시 EP.1] 열역학 : 수분을 날려버리는 훈연의 사투

by 소금꽃한스푼 2026. 5. 24.
 
가쓰오부시 —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식재료의 탄생
Episode 1 / 2
열역학
수분을 날려버리는 훈연의 사투
 

다에서 가장 빠르고 뜨거운 피를 가진 포식자 중 하나인 참다랑어와 가다랑어. 역설적이게도 이 거대한 붉은 단백질 덩어리는 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가장 빠르게 썩어 들어가는 치명적인 부패의 숙명을 안고 있습니다. 흑산도의 홍어가 요소(Urea)를 암모니아로 분해하며 스스로를 방어하는 '알칼리성 발효'를 선택했다면, 일본 가고시마와 시즈오카 해안의 어부들은 전혀 다른 물리적, 화학적 접근법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선의 몸속에 존재하는 모든 수분을 0%에 가깝게 완벽하게 증발시켜 버리는 극한의 열역학적 사투입니다. 수분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 어떤 박테리아나 미생물도 생존할 수 없다는 단순하지만 가혹한 진리 아래, 가다랑어는 참나무 연기 속에서 서서히 돌덩이처럼 단단해져 갑니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식재료이자 궁극의 감칠맛을 품은 가쓰오부시의 탄생, 그 첫 번째 단계인 '아라부시(荒節)' 제작 과정에 숨겨진 훈연과 보존의 화학적 메커니즘을 낱낱이 추적합니다.

여러가지 다랑어들 - 출처 : https://chickenofthesea.com/blog/types-of-tuna/

부패와의 전쟁 — 단백질의 숙명과 열처리의 시작

가다랑어(Katsuwonus pelamis)는 붉은 살 생선 중에서도 유독 수분과 혈액량이 많아 부패 속도가 일반 백색육 생선에 비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릅니다. 바다에서 건져 올려져 생명을 다한 직후부터, 가다랑어 체내의 내장 효소와 외부의 해양 미생물은 폭발적으로 증식하며 단백질 덩어리를 아미노산과 암모니아로 분해하기 시작합니다. 부패의 시계가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가쓰오부시 장인들이 꺼내든 첫 번째 무기는 바로 압도적인 '열(Heat)'입니다.

갓 잡은 가다랑어의 머리와 내장을 신속하게 제거하고, 필렛 형태로 살코기만을 분리해 섭씨 90도 이상의 펄펄 끓는 물에 1시간 이상 푹 삶아냅니다. 이 뜨거운 탕전 과정을 일본어로 '샤주쿠(煮熟)'라고 부릅니다. 이 강렬한 열처리는 단순히 붉은 살을 하얗게 익히는 물리적 변화를 넘어, 생선 내부에서 활동하는 부패 효소의 작용을 즉각적이고 영구적으로 정지시킵니다. 또한 표면의 단백질을 빠르게 응고시켜 외부 미생물이 내부로 침투하는 경로를 물리적으로 차단합니다. 하지만 삶는 것만으로는 생선 내부 깊숙이 자리 잡은 엄청난 양의 수분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없습니다. 이는 기나긴 수분과의 전쟁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합니다.

가다랑어 - 출처 : https://www.seaforager.com/about-your-seafood-seaforager/albacore-tuna-44c85
샤주쿠 이후의 가다랑어 - 출처 : https://www.kobayashi-foods.co.jp/washoku-no-umami/syajyuku
바이칸(焙乾) — 수분을 증발시키는 참나무의 지옥불

삶아낸 가다랑어 조각은 가시와 뼈를 일일이 발라낸 후 본격적인 열역학적 시련의 공간으로 들어갑니다. 바로 '바이칸(焙乾)', 즉 밀폐된 공간에서 장작불로 훈연하고 건조하는 과정입니다. 훈연장 내부의 온도는 섭씨 80도를 훌쩍 넘고, 단단한 참나무나 가시나무 장작이 타들어가며 내뿜는 짙은 잿빛 연기가 가다랑어를 사방에서 집어삼킵니다. 이 수분 증발 과정은 결코 단 한 번의 훈연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장인들은 하루 종일 뜨거운 연기를 쐬어 생선 표면의 수분을 날려버린 뒤, 밤이 되면 불을 끄고 서늘한 곳에 방치합니다. 이는 내부 깊숙한 곳에 남아있는 수분이 삼투압과 모세관 현상에 의해 다시 표면으로 서서히 배어 나오도록 기다리는 휴지기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불을 지펴 표면으로 배어 나온 수분을 가차 없이 증발시킵니다. 짧게는 10일, 길게는 한 달 가까이 매일같이 반복되는 이 가학적이고 지루한 담금질은 초기 가다랑어 중량의 70%를 차지하던 수분율을 20% 이하로 끌어내립니다. 열과 연기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이 혹독한 환경 속에서 가다랑어는 점차 물컹한 생선의 형태를 잃고, 짙은 흑갈색의 딱딱한 나무토막처럼 변해갑니다. 이것이 가쓰오부시의 1차 완성 형태인 '아라부시(荒節)'입니다.

바이칸 - 출처 : https://note.com/tebiyama/n/nb3a005749542
페놀 화합물의 코팅 — 연기가 만들어낸 철벽의 항균 방패

바이칸(훈연) 과정에서 참나무가 연소하며 발생하는 짙은 연기는 단순한 열기의 덩어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수백 가지의 복잡한 화학 물질을 포함한 기체 상태의 천연 방부제입니다. 목재가 고온에서 불완전 연소할 때, 나무의 골격을 이루는 주요 성분인 리그닌(Lignin)과 셀룰로오스(Cellulose)가 열분해되면서 다량의 페놀류(Phenols) 화합물과 유기산, 알데히드 성분이 대기 중으로 뿜어져 나옵니다. 이 짙은 연기 입자들은 수분이 증발하며 미세한 구멍이 뚫린 가다랑어 표면에 강력하게 흡착되어 끈적하고 두꺼운 방수 코팅층을 형성합니다.

특히 연기 속 페놀 화합물은 박테리아의 세포막을 파괴하고 미생물의 단백질 합성을 억제하는 강력한 항균 작용을 발휘합니다. 동시에 연기에 포함된 포름알데히드와 아세트산은 생선 표면의 pH 수치를 급격히 낮춰, 부패균이 도저히 번식할 수 없는 치명적인 산성 환경을 조성합니다. 즉, 훈연은 단순히 열을 가해 수분을 날리는 1차원적인 물리적 건조 과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썩기 쉬운 생선 표면에 자연이 허락한 가장 강력한 화학적 방패를 겹겹이 두르는 경이로운 보존 과학이자, 단백질의 숙명을 거스르는 위대한 화학적 연금술인 것입니다.

아라부시 - 출처 : https://mazii.net/ko-KR/search/word/jaen/%E8%8D%92%E7%AF%80
"펄펄 끓는 열탕과 참나무가 토해내는 매캐한 연기 속에서,
가장 빠르게 썩어가는 바다의 단백질은 불멸의 시간을 얻는다.
수분을 잃어버린 자리에 피어오르는 짙은 훈연의 화학은
생선을 나무토막으로 바꾸어놓은 극단적 보존 과학의 서막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