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골레의 그 조개 — 마닐라 클램의 세계 여행
파스타 메뉴판에서 '봉골레'를 고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개 종류를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조개 파스타. 화이트 와인 향, 올리브오일 향, 마늘 향. 조개 몇 개가 껍데기째 면 위에 올라오는 것.
그런데 그 조개는 어디서 왔을까. 이름은 '마닐라 클램'이다. 필리핀 마닐라가 이름 안에 있다. 그런데 정작 이탈리아 봉골레의 주인공이 됐고, 지금은 한국 바지락과 헷갈릴 만큼 한국 해안에도 산다.
한 조개의 여정이 꽤 길다.

이름의 역설 — 마닐라에서 왔지만, 마닐라 것이 아니다
마닐라 클램의 원산지는 일본과 한국,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연안이다. 학명은 Venerupis philippinarum — 필리핀산이라는 뜻이 이름에 박혀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필리핀이 원산지가 아니다.
19세기 서양 학자들이 표본을 처음 분류할 때 필리핀에서 채집된 개체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 마닐라 클램이라는 영어 이름도 같은 이유에서다. 정작 동아시아에서는 수천 년 전부터 먹어온 조개인데, 서양이 이름을 붙이면서 원산지가 뒤바뀐 셈이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바지락이라 부른다. 일본에서는 아사리(アサリ). 같은 종이다.

세계로 퍼진 조개 — 우연한 밀항
마닐라 클램이 유럽에 정착한 것은 20세기 일이다. 1930년대에서 1960년대 사이, 태평양 굴(Pacific oyster) 양식을 위해 일본산 굴을 유럽과 북미로 수입했다. 그 굴 포장재 사이에 마닐라 클램의 치패(稚貝, 어린 조개)가 섞여 들어갔다. 의도한 이주가 아니었다.
그런데 마닐라 클램은 유럽 해안에 너무 잘 적응했다. 프랑스 대서양 연안, 영국 남부 해안, 이탈리아 아드리아해. 자연산처럼 번성했다. 지금 유럽 시장에서 팔리는 봉골레용 조개의 상당수가 이 마닐라 클램이다.
미국 서부 해안도 마찬가지다. 워싱턴주와 브리티시컬럼비아의 갯벌에 퍼진 마닐라 클램은 지금 그 지역 최대 상업용 조개 중 하나가 됐다.
동아시아에서 시작해, 굴 포장재 사이에 숨어 태평양을 건너고 대서양까지 닿았다.

맛과 식감 — 짭조름하고 단단한 바다
살이 탄탄하고 국물이 진하다. 바지락과 비교하면 껍데기가 좀 더 두껍고 살이 더 실하다. 단맛과 짠맛이 균형 있게 공존하며, 가열하면 감칠맛 가득한 국물이 나온다. 이 국물이 봉골레 소스의 핵심이다. 따로 육수를 쓰지 않아도 조개에서 나오는 물만으로 파스타 전체가 완성된다.
조개 특유의 비린맛이 적어 해산물을 낯설어하는 사람도 비교적 잘 먹는 편이다. 해감을 제대로 하면 흙 냄새도 거의 없다.
영양
단백질이 풍부하고 지방이 적다. 철분, 아연, 비타민 B12 함량이 특히 높아 빈혈 예방과 면역력 강화에 좋다. 타우린도 풍부하다. 100g당 칼로리는 약 50~70kcal 수준으로 낮아, 고단백 저칼로리 식재료로 손꼽힌다.
대표 음식
🍝 봉골레 비안코(Vongole Bianco) — 마늘, 화이트 와인, 올리브오일, 파슬리. 조개 국물이 파스타를 감싸는 이탈리아 고전.
🍲 바지락 칼국수 — 한국식. 진한 조개 육수에 손칼국수 면. 시원하고 담백함의 정수.
🫕 바지락 된장국 — 조개와 된장의 환상 조합. 숙취 해소 국으로도 유명.
🥘 포르투갈 아메이조아스(Ameijoas à Bulhão Pato) — 마늘, 고수, 화이트 와인에 조개를 볶은 포르투갈 타파스.


💡 소금꽃 실용 팁
해감은 소금물(물 1L + 소금 2큰술)에 어두운 곳에서 최소 2시간. 신문지나 뚜껑을 살짝 덮어두면 조개가 안심하고 모래를 뱉는다. 봉골레 파스타를 만들 때는 조개가 입을 벌린 직후 바로 불을 줄일 것 — 오래 가열하면 살이 쪼그라든다. 입이 열리지 않는 조개는 반드시 버릴 것.
"이름은 마닐라지만, 고향은 동아시아다. 수천 년간 이 바다에서 살다가 어느 날 굴 상자 속에 숨어 세계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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